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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월/10Off

내가 왜 수학과 대학원에 가게 되었는가

내가 대학생이 된 것은 2007년이다. KAIST는 무학과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1학년에는 기초과목을 들었고, 내가 본격적으로 수학 과목들을 듣기 시작한 건 2008년부터였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수학과 전공 72학점, 대충 말해서 약 스무 과목 정도를 들어왔고 이번 학기에 졸업하게 되었다. 내년부터는 별 일 없는 한 석사과정을 밟고 있으리라.1

어쨌든 이 긴지 짧은지 영 종잡을 수 없는 기간 동안 나는 수학을 공부했다. 지금 돌아와서 보니, 참 힘든 기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힘들었던 이유 중 몇 가지는 아마도 내가 공부할 방법을 잡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그냥 눈앞에 떨어지는 퀴즈를 위해 공부를 하고,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하고, 학점을 위해 공부했다. 지도교수님께는 단 한 학기 수업을 들었고, 학사에 관련한 몇몇 자잘한 사인을 받는 걸 제외하면 그다지 찾아뵙지도 못했다.

이렇게 된 까닭은 내가 수학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KAIST의 많은 수는 과학고 출신이고, 이들은 대개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수학이나 과학의 한 분야에 특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경시대회를 대비해 공부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우리 수학과의 많은 수는 이러한 '수학경시 출신'이 차지한다.2 반면 나는, 2학년 1학기 수강과목을 선택하기 직전까지 내가 수학을 공부해도 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컴퓨터쪽에서 재능을 발휘했었고(과연 이게 재능인지는 지금 생각해보면 의심스럽지만), 경시 대비를 하지 못한 것과 모 부장교사의 나를 대하는 태도에 질린 것 때문에 나는 다행히도(아마도) '정보 영재'로는 도태되었고, 수학과 과학에 그렇게 특출나지는 못했던 나는 과학고 입시에서 떨어졌다. 일반계 인문계고에 진학해서는 문과를 선택했던 적도 있지만, 결국 이과에 가서 물리쪽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는 정말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입학당시 생각했던 건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였지만, 내 생각이 현실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포기했고, 물리학과에 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반물리학실험II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었다. 아마 난 과학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대학 2학년이 눈앞이었다.

내 결정은 이론의 한쪽 끝과, 사회의 한쪽 끝을 동시에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할 수 있었고 KAIST에서 제공하는 전공 중 가장 추상적인 걸 공부하는 수리과학과와, 가장 인문/사회적인 능력을 요하는 경영과학과(당시 BEP:Business Economics Project)를 복수전공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결정에 이 생각만 투영된 건 아니었다. 수학과 금융을 접합시켜서 어떻게 살아보자...는 생각도 있었고, 과학은 내게 안 맞는 것 같아서 경영학을 공부해서 그쪽으로 나가야겠는데, 경영학만 전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제일 요구학점과 이수요건이 만만했던 수리과학과를 선택하게 되었기도 하다. 지금 와서 보자면, 내 재능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를 테스트해 보기 위한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 이 실험의 답이 나왔다. 두 전공 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40학점이다. 졸업학기인 나는 경영과학과 학점을 40학점 딱 맞췄고, 그에 비해 수리과학과 전공은 72학점을 들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어쨌든 나는 사회적인 능력이 부족했다. 몇몇 경제학에 관한 과목과 일부 법과 제도에 관한 과목에는 흥미가 갔지만, 어쨌든 경영에 필요한 의사결정, 논의의 과정이 나에게는 잘 맞지 않았다. 반면 수학은 내게 좌절과 도전을 선사해 주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힘들었지만 어떠한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과정이, 지금은 꽤나 즐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수학을 더 배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내가 수학을 재미있다고 느끼게 된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겨우 올해 들어서, 그러니까 학부 4년차가 되어서 이런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 전까지 나는 수학의 절차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빨리 이 고된 과정을 거쳐서 빨리 사회에 나가고 싶었던 생각 뿐이었다. 금융수학에 관한 과목을 모조리 섭렵했다. 그러나 르벡 적분을 듣게 되며, 위상수학을 이해하게 되며, SDE를 알게 되며 내 생각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수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지금의 내가 말하는 건,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 수학을 공부해 오신 분들께 실례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에 대한 내 생각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아마 다음 포스팅에서 '학부에서 수학을 공부할 때 힘든 점'에 대해 다룰 것 같다.((사실 이 글을 그 글로 쓰고 싶었는데 내가 항상 그렇듯 서문이 너무 길다)) '확증편향'과 '목적성의 결핍', 이 두 가지는 정말 내가 수학을 공부할 때 힘들었던 것이고 지금 와서도 내가 이걸 잘 극복했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이 문제들을 인지하고 있고, 내가 수학을 공부할 때 효과적인 도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전차로3 나는 수학을 계속 공부하게 되었다. 이 블로그를 열며 지은 제목인 '학부생 주제에 건방지다'는, 아마 내가 대학원생이 되어서도 이어가고 싶다. 그 때의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수학을 계속 공부하게 된 이유는 학부생 때 이런 건방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니까.

이 자리를 빌어 내가 수학과 대학원으로 진학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해야 한다. 나중에 자세히 쓰기 위해 남겨두자.

수리과학과 07학번 이 재석.
수리과학과 최 건호 교수님.
전산학과 Otfried Cheong 교수님.
많은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들.
거친 학교생활을 함께 헤쳐나간 HAJE 친구들.

  1. 어쩌다보니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게 타이밍이 기막힐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 금요일에 대학원 최종합격 공지를 확인했다. []
  2. 또 많은 수를 차지하는 학생들은 경제, 금융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학생들이다. 나 또한 꽤 오랫동안 이 분류에 들어가 있었다. []
  3. 훈민정음 언해에서 발췌. 훈민정음 서문의 언해본은 고등학교때 배운 이래로 정말 좋아하는 글귀가 되었다. []
카테고리: 수학생활 덧글 잠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