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trivial Everyday 자명한 날은 단 하루도 없다

1910월/14Off

명동 파쿠모리의 드라이카레 믹스

뜻밖의 만남에서 뜻밖의 바람맞음을 당한 나는 그 상심을 채우기 위해 멍하니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잠시 정신을 내버려두고 있다가 문득 주변을 살펴보니 종로 2가였다. 이쯤이면 괜찮겠지 하고 내려 이제 뭘 할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집이다. 집에 가야지. 하지만 그 전에 저녁을 먹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10월의 저녁은 이미 어둑어둑하다. 밖에서 무언가를 먹자.

근처에 명동이 있으니까 명동까지 걷기로 했다. 일단은 강남에서 없어져 사기가 곤란해진 비첸향 육포를 몇백 그람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먹던 대로 칠리 포크와 슬라이스 포크를 얼마간 사 들고서 주변에 먹을만한 집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노란색 간판에 일본어가 군데군데 써진 카레집이었다. 일본식 카레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매콤한 맛과 적절하게 올라간 육류 토핑이 딱 내 취향이다. 처음 가 보는 집이라 조금 주저가 되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큰 고민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손님이 얼마 없어 닫는 시간인가, 하고 시계를 보니 여덟시 오십분이 었다. 점원에게 언제까지 하냐고 물어보니 아홉시 반까지 한다고 한다. 그 정도면 먹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 자리를 잡고 앉아, 어쨌든 시간이 촉박한 편이니 이 집의 대표메뉴 같은 것을 눈대중으로 골라 주문한다. 드라이카레 믹스라는 것이 아무래도 대표메뉴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넓은 접시에는 카레가 깔려 있고 밥 한 덩어리와 손가락 너비보다 얅간 두껍게 썬 돈가스 세 조각, 새우튀김 한 조각과 닭튀김 한 조각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밥 위에는 갈색 퍽퍽한 질감의 얇은 판(이걸 드라이카레라고 하는 모양이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일본식 닭튀김, 그러니까 가라아게를 좋아하기에(만약 이 '대표메뉴'에 가라아게가 없었다면 나는 가라아게가 들어간 녀석을 시켰을 것이다) 가라아게부터 살펴봤다.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가라아게라고 하기에는 조금 색이 옅다. 일본에서 이런 색의 가라아게를 본 적이 있으니 불평할 거리는 아니다. 베어물자 갓 튀긴 듯 기름 섞인 육즙이 뚝뚝 떨어진다. 나쁘지 않다.

주인공인 드라이카레라는 것은, 그야말로 건조한 카레라는 느낌으로 밥 위에 덩어리처럼 얹혀진 음식인데 그렇게 건조하지는 않고 물로 카레가루를 반죽한 느낌이었다. 식사에 포함된 카레 자체가 연한 느낌이 있고 드라이카레가 향이 강한 느낌으로 밥에 적당히 으깨 먹으면 꽤 먹을만 했다.

얇게 썰려 나온 돈가스는 내가 운이 없었는지 힘줄이 섞인 부분이 씹혀 조금 먹기 불편했지만 딱히 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새우튀김은 새우 느낌이 조금 나게 씹혔고, 뭐 새우튀김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맵기 단계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요즘 일본식 카레집의 특징인 듯 하나, 어차피 나는 항상 1단계(매운맛이 있되 제일 안 매운 맛)를 먹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다. 그것만 먹어도 이미 땀이 나고 충분히 맵기 때문이다. 이런 카레를 먹으면 어쨌든 기운이 난다. 기운이 나지 않는다 싶으면 나는 카레를 먹는다. 이러한 의존할 것이 있다는 것은 참 행운이다. 어느새 바람맞은 일은 기억속에 차곡차곡 접혀 들어가고 있었다.

259월/14Off

야탑 짱가네의 매콤돈까스

대학병원은 싫다. 특유의 공기와 환자와 노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나도 그 공기에 속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있던 기운도 빠지는 공간이다. 수납을 하고 약을 수령하기 위해 아무 일 없이 대기하는 시간은 그 감각을 극대화한다.

지긋지긋한 정기검진을 마치고 나온 시간은 오후 세 시하고도 삼분의 일 시간정도. 집에 돌아갈 일만 남았지만 점심을 먹지 않아 배고프기도 하다. 밥을 먹지 않아도 좋고 먹지 않아도 좋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운에 맡기기로 했다. 집에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서 눈앞에 보이면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를 먹기로 정했다. 운이 좋게도, 혹은 아쉽게도 버스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이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매운 돈까스는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음식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고기가 두텁게 살아있는 일식 돈까스라는 이유도 있지만, 매운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게 더 근본적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이 근처에서 가본 집은 이 곳밖에 없고 오늘은 딱히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번 저녁 때, 그러니까 여섯 시하고도 이분의 일 시간 즈음에는 이 '짱가네'라는 간판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기다렸다 혼자 들어간 나는 분식집 특유의 비좁은 가게에서 점원의 '합석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라는 양해의 말까지 들을 정도로 붐비는 집이었다. 오늘은 한산했다. 그래도 테이블의 절반은 차 있었다. 번성하고 있는 듯 하다.

가볍게 매콤돈까스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맵지 않은 돈까스를 주문하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이 집에는 맵지 않은 돈까스가 없다는 말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제일 맵지 않은 매콤돈까스, 그 다음으로 매운 돈까스가 있고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은 한 단계 더 매운 돈까스가 있다. 냉면도 있지만 분식집에서 냉면을 먹는 것은 내겐 정말 큰 모험이다.1

콘스프와 단무지가 세팅되고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병원에 대해 생각한다. 의사를 보고 처방을 받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삼 분 이십 초이다. 십 분마다 세 명의 환자를 예약받는 교수님은, 뭐 이것에 불만은 없지만, 끊임없이 환자를 본다. 나머지 시간도 컨베이어벨트. 수납을 위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내 차례가 되면 돈을 낸다. 장소를 옮겨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다 내 이름이 불리면 약을 받고 병원을 나온다. 대학병원에 오는 시간의 대부분은 기다림이다. 그 기다림의 시간동안 병원에 물드는 감각이 끔찍하게 피부를 기어올라온다.

한산한 시간에 왔는데도 은근히 손님의 회전이 많다. 많은 테이블이 두 명이 와서 물냉면 하나와 매콤돈까스 하나를 시켜 나누어 먹는 분위기이다. 나도 같이 올 사람이 있다면 저렇게 먹을까? 하지만 일부러 누군가를 데려와서 먹을 그런 가게는 아니다. 근처에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가끔 오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온다.

두 덩이의 '왕돈가스'에 붉고 매운 소스. 포크와 나이프로 적절한 크기로 그때그때 잘라 입으로 옮긴다. 야채 샐러드와 마카로니 샐러드, 콘 샐러드와 밥을 적당히 배분하여 매운 맛을 완화시키면서 먹는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그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엔돌핀 같은 것이 분비된다던가. 그 때문인지 쉴새없이 입으로 통각 덩어리를 밀어넣는다. 이게 매운 음식을 먹는 맛이지. 이게 싫은 거기도 하지만.

조금 땀을 흘리고 나니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대학병원의 불쾌함은 어느새인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느낌이다. 나쁘지는 않다. 이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뿐인가. 제길. 마지막 기다림이 남아있었잖아. -끝-

  1. 첨언하자면 매콤돈까스를 주문하고 '소스를 따로' 주문하면 맵지 않게 돈까스를 먹을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소스 없는 돈까스는 싫기 때문이다. []
219월/14Off

평가옥 삼성점의 평양냉면

그는 냉면을 잘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은 일요일이고 우리가 만난 장소는 선릉역이다. 다시 말해 비즈니스 지역의 식당가인 이곳에는 연 가게가 얼마 없다는 뜻이다. 냉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을 냉면가게, 그것도 평양냉면가게에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다소 배려가 모자란 모습이지만 우리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없었다.

다행히 이 가게는 냉면 외에도 온반과 만두국을 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점을 확인한 후 가게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4인용 입식 식탁과 좌식 식탁이 반반씩 놓인 전형적인 평양냉면집의 홀이었다.

나는 평양냉면을 시키고 그는 닭고기가 들어간 만두국을 주문했다. 냉면은 식사로서는 부족할 지 모르지만 평양냉면을 애호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곳의 맛을 알아둬야 나중에 또 올지 오지 않을지를 정할 수 있으니까. 그와 나는 막역한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의 먹는 것에 눈치를 보는 사이도 아니다. (애초에 그런 사이는 이성을 처음 만나는 자리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온다. 내 것은 맑은 국물에 면 덩어리가 담겨있는 넓은 그릇, 그의 것은 붉은 국물에 닭고기 덩어리가 보이는 뚝배기다. 기대한 모습과 다른 만두국의 색에 그는 당황하는 듯 보였지만, 한두 입 먹어보더니 별 상관없다는 기색이다.

나는 매번 하던 동작대로 자연스레 그릇을 입에 가져다 댄다. 국물을 먼저 맛보는 것이 내 평양냉면 즐기기의 첫 수순이다. 조금 진하다. 그릇을 보니 고추를 잘라넣은 것이 채썬 파와 함께 국물에 올라가 있다. 이것 때문인가? 알싸하게 매운 맛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평양냉면으로는 이례적이다.

그 다음으로는 면을 국물에 잘 풀어헤친 후 젓가락으로 건져올려 입에 넣는다. 음. 꽤 괜찮다. 씹는 맛도 있으면서 가볍게 잘 끊어지는 메밀 면. 이 맛이 있기에 평양냉면을 먹는 걸 그만둘 수 없다. 정신없이 먹다보니 어느새 면이 별로 없다.

국물로 배를 다시 한 번 채우고 그와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화제를 바꿔 근황 이야기로 들어간다. 그와 나는 동갑이면서 서로를 깍듯이 존재하고, 서로의 이름에 '선생님'을 붙여 호칭하는 조금 이상한 관계다. 알고 지낸 지는 칠 년이 넘지만 친구라기엔 서로를 모르고, 모르는 사이라기에는 서로의 소식을 너무 자주 듣는 그런 애매한 관계.

내가 시간을 무용하게 날려버리고 있는 이야기와 그가 어떻게 앞으로 행동할지에 관한 이야기를 교환한다. 둘의 공통 지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교환한다. 뭐 그런 이야기들. 냉면의 고명은 수육처럼 얇게 썬 돼지고기였다. 계란 반 쪽과 야채를 먹고 나니 그릇이 깔끔하게 빈다. 그의 그릇도 비었다.

이 집의 온반과 만두국은 소고기를 넣고 끓일지 닭고기를 넣고 끓일지를 정할 수 있는 모양이다. 소고기가 닭고기보다 귀하다는 통념에 반하게 닭고기가 천원씩 비싸다. 뭐 소고기덮밥보다 돈까스덮밥이 더 비싼 걸 봐도 소고기가 항상 더 비싸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 집은 닭 육수에 자신이 있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집 냉면도 닭 국물이려나. 애석히도 나는 국물 육수가 뭔지 알 정도로 혀가 민감하지 못하다.

그와 오렌지 시럽이 들어간 커피를 마시고 조금 걷다 헤어졌다.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처럼 편안한 만남이었다. 그와 내가 공유하는 '오타쿠 공대생'이라는 코드 때문일까. 배가 고프고 산책도 고파 이태원과 명동을 들러 청키면가의 완탕면을 먹고 비첸향의 육포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끝-